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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하다가
- 01 Dec, 2025
PR 리뷰하다가 나는 언제 내 일을 하나요?
PR 리뷰하다가 나는 언제 내 일을 하나요? 오늘도 오전 10시가 되기 전에 슬랙에 네 개의 PR 링크가 쌓였다. "개발님, 이거 좀 봐주실래요?" 심장이 철렁한다. 매번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잊는다. 아, 그래.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었지. 릴리즈 전에 끝내야 할 API 최적화 작업. 어제도 못 했고, 그 앞날도 못 했고, 재작년 같은 계절에도 못 했던 그것. 테크 리드지만 직책은 없는 이상한 위치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되기까지는 논리가 명확했다. 7년을 이 회사에서 일했으니까, 후배들 PR은 내가 봐야지. 아키텍처 결정? 내가 한다. 신입 온보딩? 내가 한다. 레거시 코드 리팩토링 방향? 당연히 내가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세미 테크 리드가 되어 있었다. 세미가 아니라 완전 테크 리드인데 직책은 없다. 연봉은 6500만원. 동기들은 이미 7000을 넘었다. 관리자가 면개 때 "개발 실력도 좋고 후배들도 잘 챙기시니까 기여도가 크신 거 같아요"라고 했을 때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기여도가 크다고? 기여는 자신의 일을 하는 건데, 나는 지난 3개월간 내 일을 얼마나 끝냈는가.아침 9시부터 체크인까지 5시간의 PR 리뷰 오늘 타임라인을 그려보자.09:30 - 첫 번째 커피 + 첫 번째 PR 리뷰 시작 09:45 - DB 쿼리 부분에서 N+1 이슈 발견, 코멘트 작성 10:15 - 두 번째 PR 도착, 인증 로직 검토 10:50 - 후배 A가 "개발님, 제 코멘트 봤어요?" 11:20 - 세 번째 커피 + 세 번째 PR (Redis 캐시 레이어) 12:30 - 점심 시간, 하지만 마음은 불안함 14:00 - 돌아와서 네 번째 PR 15:30 - "어? 벌써 이 시간?" (내 일은 여전히 0% 진행)12시간 근무 중 진짜 내 업무에 손을 댄 시간은 1시간 미만이다. 그 1시간도 불완전한 포커스다. 체크인 5분 전에 마지막 PR 코멘트를 남기는 나를 보면, 나는 이 회사의 미식축구 쿼터백처럼 느껴진다. 모든 플레이를 지휘하지만, 정작 터치다운은 못 하는 그런 역할. 기획자는 여전히 "간단하겠죠?" 어제 회의에서 기획자가 했던 말. "이거 캐시 레이어 한 번 쉬우신데 이주말까지 가능할까요?" 내가 그 시간에 뭘 할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토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PR 리뷰. 왜냐하면 월요일 배포가 잡혀있으니까. 그리고 그 PR들은 당연히 내가 봐야 한다. 나는 "네,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뭐, 또 못할 건가. 못해본 게 어디 있나.슬랙 알림이 가져온 심리적 불안정 가장 힘든 건 타이밍이다. 내가 드디어 우리 서비스의 응답 속도 분석에 집중하려던 순간, 슬랙 알림음이 울린다. 후배A: @개발님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후배B: 개발님 한 번 봐주시겠어요? 기획: 개발님 이거 기술적으로 문제 없나요?심장이 철렁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서비스 응답 속도 문제를 다시 미룬다. 퇴근 후에도 슬랙을 켜지 못한다. 알림이 울릴까봐. 주말 오전 11시에 일어나려고 해도, 핸드폰을 보는 순간 미해결 PR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월요일에는 반드시 돌려야지"라는 의무감과 함께.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단지 좋은 개발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좋은 개발자라는 평가가 내게 준 건 더 많은 시간 투자, 더 많은 책임감, 그리고 정작 성장할 기회의 박탈이었다.그래도 월요일 아침은 온다 내일은 또 어떤 PR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해야 할 일 - 우리 시스템의 구조적 개선, 신입들을 진정한 시니어로 만드는 것, 내가 없어도 팀이 돌아가게 하는 것 - 이런 건 PR 리뷰 때문에 자꾸자꾸 뒤로 밀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더 열심히 리뷰할수록 후배들이 성장할 기회도 줄어든다. 좋은 코드에 대해 "왜?"라고 물어보고 토론할 시간이 줄어들거든. 이번 주는 다르게 해보려고 한다. 월요일 아침에 내 일을 먼저 진행하고, PR들은... 음, 역시 못할 것 같다. 아, 그거요.테크 리드는 개발자인데, 개발하는 시간이 가장 적다는 게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