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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김치찌개집 단골이 되다

점심시간 김치찌개집 단골이 되다

점심시간 김치찌개집 단골이 되다 "김개발님 오셨어요" -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아, 진짜 이 맛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도 갔고, 오늘도 갔고, 내일도 갈 것 같은 이 불안감과 묘한 중독성을 말하는 거다. 회사 출입구에서 나와 왼쪽으로 50미터,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낡은 간판에 '할매 김치찌개'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있다. 처음 그곳을 찾아간 건 신입사원 때였다. 배고프고, 근처에 뭐가 있나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들어간 식당. 그때만 해도 그냥 "아, 여기 괜찮네" 정도의 느낌이었다. 가격도 저렴했고, 맛도 무난했고, 사장님이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그게 함정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몇 주 전부터 사장님이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개발님 오셨어요!"라고. 처음엔 당황했다. 내가 언제 이름을 말했나 싶어서.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사람들이 자주 와서, 그들이 "김개발이 자주 온다"고 한 말을 사장님이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게 얼마나 무섭고 부끄러운 일인지 아나?그런데 여기서 웃긴 게, 내가 인정하기 싫지만 그 순간이 정말 좋다는 거다. 회사에서는 에러 처리하고, PR 리뷰하고, 기획자의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을 들어야 하는데, 이 골목 안 식당에서만큼은 "어서오세요"가 아니라 "김개발님"이라고 불린다.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내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는 느낌이다. 개발자는 모니터에만 붙어있다가 번아웃되는 직업인데, 여기서 10분간 국물에 고개를 묻고 있으면 그게 다 사라진다. 사실 점심시간이라는 게 백엔드 개발자의 유일한 진짜 휴식시간이다. 아침 9시에 들어오면 슬랙이 이미 100개 정도 쌓여있고, 배포 관련 문제로 팀원들이 나를 찾고, 레거시 코드는 왜 이렇게 짜놨는지 답답하고, 회의는 또 회의고... 그 와중에 점심이 되면 일단 컴퓨터에서 눈을 떼는 게 규칙이다. 눈을 못 떼면 "빨리 돌아와야 해" 같은 불안감에 밥도 못 넘긴다. 단골손님의 특권 - 맥락 없이 통하는 소통 "어제 묵은지는 정말 좋더라, 오늘 또 소비했어요?" 사장님이 나한테 하는 인사가 이 정도다. 완전한 문장도 아니고, 생략도 많고, 문법도 이상하지만 그게 뭔가 따뜻하다. 마치 엄마가 "밥 먹었어?" 하는 것처럼. 누군가 내 일상의 디테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대 도시생활에선 거의 사치에 가깝다. 나도 그에 맞춰서 비슷하게 대답한다. "네, 정말 맛있어요. 추천 받고 매일 와도 질리지 않아요." 이런 식의 기계적인 대답이 아니라, 그냥 "네, 진짜요"라고만 말한다. 그럼 사장님이 웃는다. 깊은 의미는 없겠지만, 그 웃음이 얼굴에 찬 피로를 녹인다.메뉴 변화도 나는 항상 감지한다. 몇 주 전에 묵은지를 한 번 써봤던 날, 사장님이 "이거 좋지?" 하면서 자기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나는 "진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이제야 했어요?"라고 말했고, 그 이후로 늘 기본으로 깔려있다. 이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경험인지 알아? 음식점에서 내 입맛을 기억해주고, 그에 맞춰 메뉴를 조정해주는 일이. 회사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도, PR 리뷰를 퀄리티 있게 해도, 버그를 다 잡아내도, 사람들은 "어? 그럼 이것도 좀 봐줄래?" 하고 자연스럽게 더 많은 걸 요구한다. 내 취향이나 상태 따위는 관심 없다. 그냥 한 명의 자원이고, 리소스일 뿐이다. 근데 여기선 다르다. "요즘 바쁜 것 같은데 피곤해 보여. 국 많이 줄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응?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얼굴을 봤을 뿐인데? 이게 진짜 음식점 사장님과의 상호작용이 맞나 싶을 정도다. 거의 매일인데 뭔가 불안한 그 느낌 그런데 이게 문제다. 나는 지금 이 상황에 거의 중독된 상태다. 점심시간에 다른 곳을 먹을 생각을 하면 뭔가 불안하고, 이 식당을 못 가는 날은 온종일 마음이 뜬뜬하다. 전에는 가끔 건너편 회사원 식당에서 콩나물밥도 먹고, 라면도 사 먹고 그랬는데 이제는 생각도 안 난다. "아 그거요" - 내 입버릇처럼, 이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강박증인가? 아니면 그냥 일 때문에 지친 마음이 찾아낸 피난처인가? 내일도 갈 것 같고, 그 다음날도 갈 것 같은데, 이게 정상인가 싶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회사에서 집에 가기 전에 여기 들렀다. 점심도 먹었는데 왜 또 들렀냐고? 커피를 마실 겸. 아니, 거짓말하자. 그냥 여기 있고 싶었다. 따뜻한 국물을 들이켜고, 누군가 "어서오세요"가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있고 싶었다. 그 10분 안에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느껴진다. 레거시 코드도, 불합리한 기획도, 없는 승진도, 다 사라진다.문제는 여기가 한계라는 거다. 사장님은 내 이름을 부르지만,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오늘도 회사에 돌아가면 또 다른 배포가 있을 테고, 후배의 코드는 또 엉망일 테고, 기획자는 또 "간단하죠?"라고 할 거다. 하지만 점심시간 12시부터 12시 40분까지는, 이 골목의 따뜻한 김치찌개 냄새 속에서 나는 "김개발"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로부터 기억되는 누군가다. 아내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웃었다. "당신, 거기 진짜 매일 가네. 이미 사장님이 당신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당신도 거기 좋아하는 거 아니고?" 맞다. 이건 상호적인 관계다. 내가 단골이 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둘 다 이렇게 되어버렸다. 사장님도 나를 보면 반갑고, 나도 사장님을 보면 안심이 된다. 내일도 점심시간 12시에 그곳으로 갈 거다. 아마도 모레도, 그다음날도. 완벽하지 않은 내 일이나 다른 복잡한 상황들을 정당화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10분 40초는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코드도 없고, 버그도 없고, 기획자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그냥 밥 먹는 사람이 되면 된다. 혹시 누군가 이 글을 읽으면서 "아, 나도 그런 곳이 있었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공간의 이름이 뭐든 상관없다. 사장님이 너를 기억하는 식당일 수도, 창가 카페일 수도, 산책로의 벤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곳이 너를 알아준다는 거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시대에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다.결국 난 김치찌개가 아니라 그곳에서 불리는 이름이 그리워 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