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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넷플릭스 탭: 왜 항상 같은 것만 보나

퇴근 후 넷플릭스 탭: 왜 항상 같은 것만 보나

퇴근 후 넷플릭스 탭: 왜 항상 같은 것만 보나 그 루틴이 시작된 지 언제쯤일까 저는 매일 퇴근한다. 6시에 정각 같은 건 아니지만, 대충 그즈음 노트북을 덮고 슬랙을 뮤트 한다. 아니, 주말에도 뮤트 풀 일 없도록 아예 알림을 꺼두고 있다는 게 맞다. 배포일은 예외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집에 가려고 한다. 집에 가면 뭘 할까? 처음엔 진지했다. 요즘 유명하다는 드라마 본다고 했고, 시즌 1부터 차근차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얘기하는 명작들을 소화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오징어 게임》, 《달콤한 집》, 《종이의 집》... 리스트는 길었고 결심은 강했다. 그런데 지금? 지금은 그냥 넷플릭스 앱을 열고, 이미 시작한 드라마를 찾아 재생 버튼을 누른다. 같은 거다. 항상 같은 거다.폰 스크롤의 늪으로 빠져가며 넷플릭스 화면은 켜져 있다. 오프닝 영상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손에 폰이 있다. 슬랙을 확인한다. 아무도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 텐데, 왜 자꾸 확인할까. 직업병이다. 팀장이 갑자기 배포를 요청할 수도 있고, 인턴이 PR 리뷰를 재촉할 수도 있으니까. 퇴근했는데도 머리에서는 계속 일이 돈다. 인스타그램을 본다. 피드에서 봤던 사진들이 또 보인다. 릴스 가면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나온다. 화면을 아래로 밀어내린다. 또 밀어낸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계속 내려간다. 디바운싱(debouncing)이 없는 무한 스크롤이다. 이렇게 10분이 가고, 30분이 간다. 넷플릭스는 여전히 재생 중이다. 나는 화면을 안 본 지 30분이 됐다.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배운 진짜 비즈니스 모델이 뭔지 아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폰을 손에서 떨어지게 못 하는 거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도록 설계된 시스템. 내가 매일 밤 그 먹이사슬 맨 아래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게 편하다.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할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의사결정 피로를 덜 수 있다. "오늘 뭘 볼까?" 같은 질문은 이미 과거형이다. 이미 시작한 거 계속 보면 된다. 같은 드라마만 계속 재생되는 이유 여기서 재미있는 패턴을 발견했다. 내가 "새로운 걸 봐야지"라고 다짐한 적이 몇 번인가. 마음먹고 드라마 목록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흥미로워 보이는 타이틀을 클릭했다. 그리고... 포기했다. 왜냐하면 피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감정을 요구한다. 퇴근한 뇌는 거기까진 못 간다. 우리 뇌는 최소 저항 경로를 선택하도록 진화했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게 가장 편하다. 내가 이미 시작한 드라마는 다르다. 1화는 이미 봤으니까 내용을 조금 안다. 2화도 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줄거리가 흐릿하지 않다. 다시 보는 순간, 기억이 돌아온다. "아, 이 장면 있었지." 이 정도의 자극이면 충분하다. 나는 사실 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다. 소음을 틀어놓고 있는 거다. 거실에 정적만 있으면 불안하니까. 폰을 들지 않을까봐서. 뭔가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려고.슬랙은 여전히 울리지 않지만 퇴근한 지 1시간이 됐다. 넷플릭스는 아직도 재생 중이다. 드라마 에피소드가 끝나고 자동 재생으로 다음 편이 시작된다. 나는 여전히 폰을 보고 있다. 아내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좀 정신을 차린다.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물으면 "음, 뭐 별로네. 너는?"이라고 대답한다. 이미 외출했던 옷은 벗고 집에서만 입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실 조명도 꺼뒀다. TV 화면의 빛이 조명 역할을 한다. 저녁을 먹는다. 아내가 집에 있으면 뭔가 함께하는 시간이 생긴다. 그 사이에 드라마는 계속 재생된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다시 소파에 누운다. 손 닿는 곳에 폰이 있다. 아내가 옆에 있어도 폰을 본다. 이미 익숙해졌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다른 화면을 보는 일. 이게 이 세대의 부부 문화인가 싶기도 한다. 자정이 다 돼 가면 눈이 무거워진다. 그래도 한 편만 더 본다고 다짐한다. 한 편이 끝나면 또 한 편만 더. 결국 아내가 먼저 자러 간다. "너 먼저 자. 나도 곧 간다."라고 한다. 근데 안 간다. 폰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 폰이 떨어진다. 잠들었다. 넷플릭스는 아직 재생 중이다. 배터리 25%. 자동 잠금까지 3분 남았다. 화면은 계속 빛난다. 읽지 못한 슬랙 메시지들 휴일 아침, 눈을 뜬다. 폰을 집어 든다.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슬랙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동으로 튼다. 손가락이 알아서 한다. "으... 뭐가 이렇게 많아?" 팀 채널에 메시지 3개, 개인 채널에 멘션 2개, 시스템 알림 7개. 대부분은 별거 없다. 동료가 공유한 아티클, 팀 회의 내용, 배포 결과 보고. 그런데 몇 개는 어제 저녁에 온 거다. 내가 자고 있던 시간에. "아, 이거 답장해야 하나..." 생각만 하고 창을 닫는다. 주말이니까 나중에 하자. 나중에란 보통 월요일 아침 출근할 때인데, 정확히는 커피를 마신 후다. 첫 커피는 목을 헹구는 용도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됐다. 퇴근하면 슬랙을 보지 않는다. 아니, 본다. 하지만 답을 안 한다. 회신할 에너지가 없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같으니까 지금 할 필요가 없다고 자기기만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건강한 건가? 나도 감시당한다는 느낌은 안 받지만, 뭔가 도망치고 있는 건 같다. 넷플릭스에서 도망치고, 폰에서 도망치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거 같다.이게 정상이라는 게 더 무서운 이유 주말에 게임을 했다. 진짜 게임, 즉 폰 게임 말고. 실제로 콘솔에서 하는 그런 거. 아내가 권했다. "너 요즘 폰만 본다.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맞다. 나는 원래 코딩이 좋았다. 집에 와서도 사이드 프로젝트 같은 거 생각했었다. 새로운 라이브러리 시도해보고, 재미있는 알고리즘 문제 풀고. 그래서 처음에 신입 때는 계속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폰을 본다. 매일 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게 정상이라는 게 무서워서다. 직장 동료들한테 이 얘기를 했다. "너 퇴근 후에 뭐 해?"라고. 대충 다 똑같은 답이다. "그냥... 쉰다." "쉬는 방법이 뭔데?" "폰 본다. 드라마 본다. 별 거 없어." 우리는 모두 같은 늪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게 정상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반공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이건 디자인 문제다. 넷플릭스와 폰은 우리가 계속 붙어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학습하고, 자동 재생은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 "계속 보시겠습니까?" 같은 짜증나는 팝업은 없다. 그냥 다음 에피소드가 자동으로 켜진다. 우리는 편함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편함은 점점 깊어진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여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나는 답을 모른다. "내일부터는 달라질 거야"라는 다짐은 더 이상 안 한다. 너무 많이 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퇴근하면 독서를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근데 퇴근해서 소파에 누우면, 손이 자동으로 폰을 집어 든다. 뇌가 이기는 거다. 그렇다고 무포기하는 건 아니다. 겨우 그 정도 의지력도 못 발휘냐고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나는 이미 업무 시간에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퇴근해서까지 자신한테 엄격할 이유가 뭐 있나. 대신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한다. 넷플릭스 재생을 멈추는 건 못 해도, 조금 다른 환경을 만들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거실 조명을 끄지 말기. 아니면 폰을 손 닿지 않는 곳에 두기. 아니면 아내와 함께 보기.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피곤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내가 퇴근 후 에너지가 없는 이유는, 퇴근 전까지 이미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후배 PR 리뷰하고, 기획자 요구사항 해석하고, 레거시 코드와 싸우고, 배포 스트레스 받고. 남은 건 빈 깡통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퇴근 후가 아니라, 근무 중일 수도 있다. 저 화면을 끄는 날이 올까 최근에 좋은 일이 있었다. 회사에서 토이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우리 팀이 뭔가 새로운 기술을 시도해보는 거다. 최근 핫한 프레임워크 같은 거. 처음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또 일을 더 하라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이건 업무가 아니라 공부인 거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 손이 다시 키보드로 움직였다. 집에 가서도 그걸 생각했다. 새로운 라이브러리는 뭐가 다를까? 이걸 어떻게 적용해볼까? 넷플릭스를 틀어놨지만, 5분이 채 안 돼서 껐다. 딱 하나의 이유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 밤에 나는 폰을 안 들었다. 노트북을 켰다. 간단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봤다. 코드를 짰다. 에러가 났다. 스택오버플로우에서 답을 찾았다. 다시 시도했다. 작동했다. 자정을 넘었을 때, 문득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그건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플로우 상태"라고 심리학에서 부르는 그 감각.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 분명히 이게 내가 좋아하던 일이었다. 내가 일이란 걸 선택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언제쯤 마지막으로 이 감정을 느꼈지? 넷플릭스 자동 재생 화면을 넘어, 폰 무한 스크롤을 벗어나면,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었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내일 퇴근하면 뭘 할까? 아마 넷플릭스를 틀 것 같다. 습관이니까. 폰도 들 거고. 그런데 한 가지는 다를 거다. 한 번쯤은, 그냥 한 번쯤만 화면을 끄고, 노트북을 켜 볼 생각을 해야겠다는 것.결국 우리가 봐야 할 건 화면이 아니라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