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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차

결혼 2년차, 아내와의 개발자 부부 생활

결혼 2년차, 아내와의 개발자 부부 생활

결혼 2년차, 아내와의 개발자 부부 생활 그렇게 야근은 만난다 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는 건 뭐 하는 말인가. 회사에 나가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다. 아내 이수진은 UI 디자이너고, 나 김개발은 백엔드 개발자다. 둘 다 IT 회사. 둘 다 서로 다른 회사. 그런데 오늘따라 야근 문화는 똑같다. 결혼 2년 차가 되니까 알게 된 게 있다. 지인들한테 "아, 개발자랑 디자이너 부부 축하해요"라고 들을 때 정말 감동했는데, 3개월 정도 지나니까 '아, 이게 축하할 일만은 아니구나' 싶었다.월요일 오전 10시. "어제 몇 시까지 있었어?" 하는 인사말로 날이 시작된다. 나는 배포 건으로 10시까지 있었다고 했고, 아내는 "어? 나 11시까진 있었는데?"라고 대답한다. 이게 우리의 일상 인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퇴근할 때쯤이면 다른 한 사람이 야근 전화를 받는다. 처음 이 생활이 반복되고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정말 미칠 뻔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와서도 쉬지 못하는 거다. 아내도 디자인 피드백으로 예민하고 있고, 나도 레거시 코드 때문에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다. 저녁 8시, 집에는 침묵만 흐른다. 각자 슬랙을 본다. 각자 메일을 확인한다. "밥 먹었어?" "응, 너도?" 이런 식의 대화가 하루의 전부다. 라면 냄새가 나는 밤 아내가 야근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던 어느 날. 나는 혼자 집에 남았다. 회사 근처 김치찌개집에서 퇴근한 지 1시간이 안 되는데, 벌써 배가 고팠다. 이쯤 되면 밥을 먹으러 나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보내러 나가는 건 같다. 일단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두 개, 파 한 단, 라면 3개.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가 아직 손도 못 댄 반찬들. 아내가 주말에 만들어두는 반찬은 나를 위한 배려인데, 정작 함께 먹을 시간이 없어서 냉장고에 처박혀만 있다. 라면을 끓으면서 계란을 풀고 파를 썬다. 냄비에서 치직거리는 소리, 몬순이 올라오는 소리. 이게 내 저녁이다. 맛있는 요리도, 함께할 누군가도 없이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밤의 의식.그런데 신기한 거, 아내가 집에 와서 그 라면을 마주칠 때마다 웃는다. "또 라면이야?" 라고 묻지만 웃고 있다. 내가 "그래, 또 라면이야"라고 대답해도 웃는다. 이 웃음이 뭔지 알게 된 건 이제다. 고독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도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그 감정이다. 내가 먼저 집에 있을 때는 좀 다르다. 나는 집에 와서 TV를 켜고 누워 있다. 넷플릭스 화면이 보조 모니터처럼 변해버린 지는 언제였을까. 퇴근해서 이것도, 퇴근해서 저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그럼 아내가 들어온다. "밥 먹었어?" "냉장고 밥 있잖아." "아, 반찬도 남아있고..."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내는 나를 휙 지나간다. 자기 가방을 던지고, 신발을 벗고, 휴대폰을 본다. 업무 슬랙이 얼마나 쌓였나. 요청 건은 몇 개나 들어왔나. 내일 아침 회의 준비는 되어 있나.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나는 덜 외로워진다. 서로 알기 때문에 나약해질 수 있다 일반인 부부들이 부러워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개발자랑 디자이너라니, 쟤들은 서로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겠네"라는 둥, "일이 많으면 서로 도와줄 수 있고 좋겠다"는 둥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내가 야근하는 날, 나는 그 이유를 안다.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UI를 바꿔달고 했거나, 디자인 시스템 문서를 다시 정리해야 했거나, 개발팀과의 협의가 자꾸 꼬인 거거나. 나는 이런 상황들을 정확히 안다. 내 직업에서도 매일 일어나니까. "어? 나도 이런 일을 당하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내에게 공감을 건넨다. 그냥 말로만 하는 공감이 아니다. 피부로 느끼는 공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감이 때로는 둘 다를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거 봐, 기획자가 또 마지막 날에 요구사항을 바꿨어." "어? 우리 PM도 그랬거든. 완성했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런데 이것도 해야겠는데?'라고." 이런 식으로 불만을 나누다 보면, 그게 위로가 되는 동시에 서로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킨다. 공감이 공명이 되는 거다. 우리 둘 다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는 확인이 오히려 답답함을 키운다. 그럼 이건 뭐할까? 쿠션처럼 작동해야 할 배우자가 같은 난로에 있는 불장난이 되어버리는 거다.그런데 웃긴 일이 생겼다.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어떤 방식을 터득했다. "야, 오늘 하루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웃는다. 웃고 있지만 진지하다. 업무 얘기는 하지 말고, 서로가 일으킨 스트레스에 대해 공명하지 말고, 그냥 침묵 속에서 함께 있자는 뜻이다. 그리고 가끔, 정말 가끔 아내가 나를 본다. "개발자 공부하는 거 봤어. 좋아 보이더라." 이렇게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먼저 챙기거나, 나도 그렇게 한다. "그 디자인 포트폴리오 사이트, 예뻤어." 이런 식으로 서로의 작은 노력을 본다. 누군가는 이걸 당연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둘 다 출장지에서 야근하는 생활을 하는 입장에선, 상대방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봐줄 여유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결국은 옆에 있다는 것 나는 솔직하게 말할 거다. 개발자 부부 생활이 로맨틱한 건 아니다. 집에 와서도 각자의 모니터를 본다. 침실에서 자기 전까지도 휴대폰 화면을 본다. 주말에는 늦잠을 자지만, 평일에는 서로 다른 시간에 출근하고 다른 시간에 퇴근한다. 만약 모두가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면, 주말에 함께할 시간도 많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남은 것이 있다. 라면을 끓을 때, 아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는 두 그릇을 준비한다. 한 그릇은 내 것이고, 한 그릇은 그 언젠가 아내가 늦게 와서 먹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내가 집에 일찍 온 날이면, 그 라면이 두 사람이 먹는 대신 냉장고에 들어간다. 그것도 좋다. 왜냐하면 아내가 이제 있을 거니까. 기획자가 또 마지막 날에 요구사항을 바꾸면, 나는 한숨을 쉰다. 그리고 아내가 같은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럼 우리는 침묵한다. 말이 필요 없다. 그 침묵 속에서도 '난 너를 알아'라는 신호가 오간다. 주말에 치킨을 시킬 때, 나는 한 마리를 시키지 않는다. 아내가 조각을 집어갈 걸 알고 있으니까. 아내는 "야, 너 혼자 다 먹어도 돼"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말은 표면의 말일 뿐이다. 이게 개발자 부부 생활의 핵심이다. 일이 많고, 야근이 많고, 때론 침묵이 집을 채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건, 상대방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래도 옆에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출장 가는 날, 아내에게 슬랙을 보낸다. "야, 밥은 먹어?" 아내도 답한다. "응, 너도 뭐 좀 먹고 자." 이 메시지는 8글자도 안 되지만, 이건 '난 네가 어디에 있든 너를 생각하고 있어'라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의 언어는 업무 얘기가 아니라, 끼니를 챙기는 것이다. 개발자 부부 생활? 별로 로맨틱하지 않다. 하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누구보다 따뜻하다. 우리는 밤 11시에 집에 도착해서, 난로 옆에 앉은 것처럼 서로를 데운다. 전자기기의 불빛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내일도 또 다시, 각자의 야근 문화는 만난다. 결국 가장 좋은 건, 누가 먼저 오든 라면을 함께 끓일 수 있다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