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야근하는 밤, 혼자 라면을 끓이며 생각한 것
- 02 Dec, 2025
아내가 야근하는 밤, 혼자 라면을 끓이며 생각한 것
저녁 8시 47분. 슬랙 메시지가 울렸다. 아내였다.
“디자인 수정 요청 또 들어왔어. 늦을 것 같아 :(”
아. 또 그 시간이구나. 휴. 나는 모니터를 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회사 근처 편의점 가면서 휴대폰으로 “밥 뭐 먹을까” 검색해봤는데, 깊은 밤에 나 혼자 밥을 챙겨먹는다는 게 좀 이상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그냥 라면 사 왔다. 신라면과 진라면 중에 고민하다가 신라면으로. 아내는 매운 거 잘 못 먹으니까, 이건 순전히 내 선택이다.

혼자가 된 주방의 감정 기복
집에 돌아와서 냄비에 물을 부었다. 가스불을 켰다. 이 순간이 가장 낯설다. 보통 우리는 함께 집에 들어온다. 아내가 “오늘 뭐 먹을까?” 하고, 나는 “뭐든 좋아” 하고, 그러면 아내가 “좀 구체적으로 말해” 한다. 그 루프.
근데 오늘은 그 대화가 없다. 물이 끓으면서 김이 피어오르는데, 혼자 서 있는 주방이 유독 크게 느껴진다. 냄비 옆에 아내의 멀티탭 정리기 같은 거 보이고, 냉장고 문에 붙은 우리 둘이 찍은 사진 보인다. 여행 가서 찍은 거였나. 1년 전? 2년 전? 기억이 안 난다.
라면을 끓이면서 생각한 것들:
“밥을 해야 하나?” - 라면만 먹어도 괜찮지 않나? 밥까지 하면 너무 번거롭지 않나? 근데 밥 없이 라면만 먹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 아내 귀가했을 때 “저 혼자 라면만 먹었어” 라고 말하면 뭐라고 할까?
“야근이 많은 아내가 나한테서 뭘 기대하나?” - 내가 밥을 해놓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근데 오늘 배포일이었잖아. 코드 리뷰도 많았고. 내가 야근하는 날은 아내가 라면을 끓이는데, 그럼 아내가 야근하는 날은… 나도 뭔가를 챙겨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살기로 한 건가?” - 신혼집에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집을 좀 챙겨야 하지 않나?” 였는데, 난 여전히 회사만 챙기고 있다. 아내의 야근이 길어질수록, 내가 라면을 끓일 때마다 이 질문이 자꾸 떠오른다.

슬로우 라이프는 꿈이고, 우린 패스트푸드의 주인
라면이 끓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요즘 유튜브에 자주 떠오는 영상들 말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 이런 거. 영상 속 주인공은 보통 시골에 작은 집을 짓고, 정성스럽게 밥을 짓고, 밤에는 촛불 아래 책을 읽는다. 가끔 그런 삶에 끌려본다. 심지어 댓글도 “이런 삶을 살고 싶어요” 로 가득 찬다.
근데 현실은 어떤가. 난 7년 차 백엔드 개발자고, 아내는 UI 디자이너다. 우린 서울에 작은 전세를 얻고 살고 있다. 그 전세금도 부모님 도움으로 겨우 마련했다. 정성스러운 밥은커녕, 우리 저녁의 대부분은 “이거 간단하게 먹을까?” 로 시작된다.
화요일 점심? 회사 근처 김치찌개집. 목요일? 배달음식. 금요일? “아 오늘은 치킨 시킬까” 가 뭔가 특별한 일처럼 느껴진다. 주말 아침? 늦잠 자고 두 시간 뒤에 치킨. 이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싫다고 느껴지면서도 바꿀 에너지가 없다는 거다.
후배 PR 리뷰하고, 슬랙 알림에 정신없고, 주말에도 “혹시 모르니까” 노트북을 켜둔다. 아내는? 밤 11시에 “마진 수정이 또 나왔대” 하고, 자정이 넘어서 “이제 끝났어” 한다. 우린 정성스러운 밥을 지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라면이다. 라면은 8분이면 된다. 신라면이 끓는 동안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들.
밥 대신 라면을 선택하는 순간, 그게 책임감인가 미안함인가
물론 나도 안다. 아내가 들어왔을 때 밥이 있으면 좋겠다는 걸. 따뜻한 국과 반찬이 있으면, 아내가 “오, 고마워” 하면서 얼굴이 부드러워질 거 같다. 근데…
“근데”가 문제다. 회사에서 배포일이었다. 배포일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다. 8시에 끝날 줄 알았는데 9시까지 간다. 이틀 전부터 “내일 배포 있으니까 좀 일찍 집에 갈게” 라고 말해놓고도, 정작 배포날 오전 9시에 “어? 이게 왜 이래?” 하면서 시작된다. 그 와중에 아내는 밥 준비할 생각을 해야 하나? 아니다. 그 정도의 여유는 없다.
그래서 라면이 합리적인 선택지가 된다. 아내가 야근하는 걸 어쩔 수 없으니까, 나도 자기 밥이라도 챙기자는 마음으로. 근데 이게 정말 책임감일까? 아니면 그냥 무책임함의 다른 표현일까?
가끔 생각해본다. “밥을 해야 하나?” 라는 질문은 사실 “내가 가정에 대해 뭘 해야 하나?” 라는 더 큰 질문의 축소판인 거 같다. 밥 하나 못 하면서 무슨 남편이냐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근데 또 다시 생각해보면, 난 지금 이 순간도 피곤하다. 일도 많고, 머리도 복잡하고, 뭔가를 결정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

결국 우린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사람들이다
밤 11시 32분. 아내가 집에 들어왔다.
“오…” 하면서 신발을 벗었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라면 먹었어?” 라고 물었다. “응. 너는?” 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회사에서 라면 먹었어” 라고 했다. 둘 다 라면이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미안했다. 왜?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아내가 회사에서 라면을 먹으면서까지 일을 했을 거고, 나도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자기 자신을 챙겼고 (라고 생각했고), 우리 둘 다 피곤해서 아무것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는 게 미안했던 것 같다.
“내일 좀 일찍 들어올 수 있어?” 라고 아내가 물었다. 내일도 배포가 있나? 아. 없긴 한데, 후배 오인턴이 새로운 모듈을 올렸고, 코드 리뷰를 해야 한다. “아마도?” 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웃었다. “뭐 하나 제대로 안 되네” 라고. 그건 우리 둘 다를 비난하는 게 아니었다. 우린 이런 사람들이니까. 계획해도 안 되는 사람들. 라면 끓일 때마다 “밥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내가 “밥 먹을래?” 라고 물었다. 아내는 “그냥 좀 누워있고 싶어” 라고 했다. 나도 알겠다. 그 피곤함. 밥을 해야 하는데, 밥을 하려면 장을 봐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하고, 씻어야 하고… 그 모든 과정이 산처럼 느껴지는 그 피곤함.
라면 한 그릇의 철학
결국 이거다. 우리는 라면 끓이는 수준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8분이면 된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 끓이고, 면 넣고, 스프 넣고, 계란 삶은 거 넣고, 파 올리고, 먹는다. 그게 끝이다.
반대로 밥은 복잡하다. 밥을 준비하려면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오늘 뭘 할까” “반찬은 뭐로 할까” “누가 먹을까” 이런 식으로. 밥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음식이다. 라면은 나를 생각하는 음식이다.
근데 결혼했으니까, 밥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난 계속 이 질문의 루프에 빠진다. 매번 아내가 야근하는 밤, 라면을 끓이면서.
“좀 더 성숙해져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다른 남편들은 어떻게 할까? 아내가 야근하는 밤, 밥을 해두고 반찬까지 챙기고 있을까? 난 못하는 게 당연한가? 아니면 나만 못하는 걸까?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
그런데 아내가 “고마워” 라고 했다. 왜 감사의 말을 했을까? 나는 뭘 한 거도 아닌데. 그냥 라면을 끓였을 뿐인데.
“뭐가?” 라고 물었다. 아내는 “뭐든. 혼자가 아니라서. 함께 있어서” 라고 했다.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우리는 둘 다 바쁘다. 우리는 둘 다 피곤하다. 우린 둘 다 밥을 챙길 여유가 없다. 그래서 둘 다 라면을 먹는다. 회사에서 하나, 집에서 하나. 하지만 적어도 우린 같은 시간대에,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거였다.
밥을 해야 한다는 미안함과 라면을 끓여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우린 그렇게 함께하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옆에 있다는 것.
그 밤, 나는 라면 국물을 마시면서 생각했다. “내일은 밥을 해야겠다” 고. 하지만 그 생각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었다. 내일도 무언가는 일어날 거고, 내일도 우린 바쁠 거고, 내일도 라면을 끓일 수도 있다는 걸. 그래도 괜찮을 거라는 걸.
왜냐하면, 우린 함께니까.
결국 밥인지 라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옆에 있다는 것 하나면 충분했다.
